매일 자라는 두 아이는 어려서부터 치아 관리를 열심히 하게 도왔지만, 끊임없이 출현하는 충치 손님은 막을 수가 없었다. 6개월에 한 번씩 치과를 가서 점검을 했는데도 아주 조그마한 충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잘 숨어있다가 발견되곤 했다. 그나마 치과 의사의 '관리를 잘한 편'이라는 평가에 위안이 되었을 뿐, 노력한 보람이 참 적었다.
1990년대 초반에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을 다니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공립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엔 친절한 이동버스치과가 나타나곤 했다. 스케치 화가로 유명한 미술가 '밥 로스'처럼 풍성하게 굵은 곱슬 퍼머를 하여 마치 바구니를 뒤집어쓴 듯 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던 여의사는 늘 친절하고 경쾌해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어린 두 딸은 치과 가는 날이면 엔도르핀이 뿜뿜 오르는 날이 된다.
가톨릭 스쿨에서 걸어서 공립학교까지 가는 시간은 15분쯤 걸린다. 가톨릭 학교에서 사거리의 백화점을 2개 지나고 조금만 더 걸으면 공립학교가 나온다. 가는 길에 큰 길가 백화점의 쇼윈도우에 전시된 레고로 조립된 왕궁이랑 커다란 비행기 모형들, 그리고 예쁜 마네킹들에 눈길을 주며 걸어 가면 4시 즈음이 된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아동용 만화가 TV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동용 버스 발판 2개를 딛고 올라서면 버스 속은 칫과 냄새가 나는 병원이다. 어린이용 치과 의자에 앉으면 최대로 눕혀서 치료용 자세를 잡아 준 후, 머리 위 버스 천정에 붙어있는 14인치 TV를 켜준다. 개구쟁이 고양이 톰과 잽싼 꾀돌이 쥐인 제리가 주인공인 '톰과 제리' 만화영화에 온 가족이 빠져있던 터라서 딸들은 번갈아 입을 벌려 의사에게 맡긴 채, 눈은 TV 화면에 붙박이가 된다. 영어로 방송 되는데 내용이 이해가 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화 속의 몸짓만 보아도 아이들은 웃음을 '크크'거린다.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이니 학교 다닌 세월이 제법 되어서 영영한 사전을 기고 다니는 엄마보다는 나을지도...
윤선생 영어도 YBM도 없는 곳이니 영어를 따로 배울 곳이 없어 남편을 제외한 가족 셋... 3살 5살 그리고 30대의 엄마는 영어가 난무하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의사소통이 불가한 문맹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유아원과 유치원을 1년 중 후반 6개월을 주 2회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 유치원에 들어간 큰 아이와 4세가 들어가야 할 유아원에 자리가 없어 기약 없이 집에서 엄마랑 머무는 작은 아이는 도서관의 그림책과 TV의 만화영화를 통해 아주 효과적인 영어학습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일 년쯤 흐르니 그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공부를 길게 한 엄마보다 훨씬 좋은 발음으로 생존 영어가 튀어나왔다. 여기저기의 만남에서 적절한 표현을 습득하며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는 어린아이의 영어 발음은 정말 'Crispy'하다는 표현에 어울리게 경쾌하고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엄마는 학교에서 생활영어를 터득 중인 아이들이 부럽기 시작했다. 그 어린 것들의 생존을 위한 스트레스는 못 본채...
물론 영영한 사전을 들고 1년쯤 지나니 의사소통의 요령도 생기고 오케이(Okey), 쏘리(Sorry), 땡큐(Thank You), 익스큐즈미(EXcuse me~) 같은 인사는 누군가와 공간을 나눠 쓰게 되는 순간 자동으로 입에서 줄줄 새는 인사들로 만들었지만, 그 외 한 두 계단만 영어가 올라가면 귀가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서울에서 읽기와 쓰기로 대학내내 익혀둔 영어가 요긴하게 빛을 발했다. 초기에 엄마의 의사 소통 수단은 상대방의 "Parden~?"에 대비한 메모지였다.
말하기에 곁들여서 분명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도록 메모지를 활용한 글쓰기...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영.영.한 쌍둥이 YBM 사전이 의지가 되었다. 다행히 한글은 야무지게 습득되어 한글 문해능력은 빵빵하니까. 그리고 수십년 전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번씩 공책에 빽빽하게 글씨를 쓰게 한 숙제 덕분에 핸드폰 세대보다는 손글씨가 제법 폼이 나니까 다행이다.
길다란 버스 칫과는 예약을 전화로 미리 해두면 이동 치과에서는 대체로 치료시간 간격을 잘 조절하여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초등학교 아동들의 충치 조기 발견과 치료를 위해 매달 정해진 요일에 공립학교의 운동장 한 쪽에서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종일 이동버스 치과가 문을 열고 기다린다. 예약 시간에 맞춰 나타난 어린 손님들은 버스에 오른다. 웬만한 기본 치료는 모두 가능하고 완전히 무료이다.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동일지라도 '초등학교 어린이'라는 치료대상의 조건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면 의사선생님의 손에 칫솔이나 치약이 선물로 들려있다.
"**는 뭘 갖고 싶니? "
하는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칫솔이나 치약 중 하나를 고른다. 마치
' 난 네가 아픈 칫과치료를 눈물 한 방울 없이 잘 참아내는 모습에 반했어~**'
하는 표정으로 칭찬을 듬뿍해주며 '엎어 쓴 바구니 머리' 치과의사는 선물을 기분 좋게 건네준다. 어른과 어린아이가 눈을 맞추며 상냥하게 기분 좋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동물 스티커와 배지도 종종 선물로 준다. 포장된 작은 사탕과 초콜릿을 한 알씩 건네주기도 한다. 치과를 다녀오는 길에 두 아이는 걷지 않고 춤추듯 스텝을 밟으며 껑충거린다, 작은 궁둥이가 흔들리면서...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힘들게 시끄러운 기계음을 들은 날인데도, 의사선생님과의 경쾌한 대화와 만화영화 '톰 앤 제리'와 칫솔 선물이 아이들의 궁둥이를 들썩거리게 하며 엔도르핀을 쏘아 올린다. 엄마는 이 나이에도 치과 약속 잡는 일은 엔도르핀은 고사하고 머리만 무거운데...
그렇게 덩달아 기분이 살짝 올라간 상태가 되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게 되는 이웃에게 평상시보다 미소를 더 많이 머금고 인사를 나누게 된다. 그때는 그랬다. 아주 가끔 폐쇄적인 사고의,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사람들의 이방인에 대한 홀대나 무시가 건네졌지만 대체로 상식적인 시스템은 이방인인 아이들도 어른도 성정이 거칠어질 필요가 없게 평화로웠다.
그중 6개월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예약하는 어린이용 이동치과는 낯선 사회에 적응하느라 긴장한 어린 두 딸의 불안감을 낮춰주고 행복을 향한 엔도르핀을 올려주는 즐거운 이동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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