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Sweet Heart/7. 산다는 것은

39. 그대도 많이 늙었수~

redlips 2021. 8. 22. 11:22

         *책이 비치는 불빛은 어디까지...

 

어제저녁 무렵에 아파트 관리실 안내방송을 들었다. '내일은 물공급이 정지될 예정이니 미리 필요한 물을 받아놓으라'라는 알림이다. Covid 19 이전에는 단수나 단전이 공지되면 우리 가족은 가벼운 드라이브를 통해 찻집을 들르거나 밖에서 식사를 하여 낮에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물과 전기 쓰임을 줄였다.

요즘처럼 하루에 호흡기 질환 환자가 2000명을 넘나드는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집콕족이 된다.

고맙게도 옆 지기는 밤늦게 내일 아침 몫의 샤워까지 하고 나서 욕조에 물을 반쯤 받아두었다고 했다. 내일은 단수여도 화장실 사용 문제로 스트레스 받지 않겠다. 일단 욕조에 물이 찰랑거리니...

음용수는 여러 물병을 꺼내서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다. 내일 이른 아침에 정수기 물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정도 준비해두면 내일 아침, 점심, 저녁에 딸이랑 옆 지기가 각종 약을 먹을 때 쓸 물과 커피용 물은 넉넉하다. 음식 조리에 사용할 물은 5리터 주전자에 가득 받아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 행여 발에 걸려 넘어지면 물 청소에 힘을 쏟게 될까 봐 ...

                                                *H 도자기 부부 커피잔 (출처: Daum)

혹시 사용처가 늘어나는 경우에 대비해서 8kg들이 김치통 빈 용기 2개를 꺼내서 수돗물을 가득 담아 장식장 앞에 두었다. 물을 가득 담은 통은 허리에 무리가 가지 싶게 묵직하다.

내일 아침 몫의 바닥 물걸레 청소도 밤에 미리 하고 밀걸레를 정갈하게 빨아두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도록 알람도 설정해두었다.

드디어 날이 밝고 샤워를 하자마자 정수기 물을 병에 담는 일까지 마무리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이 시작되었다. 물을 충분히 받아놓고도 단수되기 전에 아침 뒤처리까지 끝낼 요량으로 가벼운 아침식사까지 서둘렀다.

이제 보니 난 욕심이 좀 많은가 보다. 물을 충분히 받아놓고도, 단수가 되기 전에 설거지까지 마무리하려는 마음인 걸 보니...ㅎㅎ

오후 5시에 물이 돌아온다고 하니 많은 물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겨울 김장처럼 미리 물을 담아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바깥 날씨는 여름 끝자락에 어울리게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하고 정오 즈음부터 에어컨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게 한다. 오늘은 쾌청하고 미세먼지도 없으니 미닫이 창문들을 활짝 활짝 밀어서 열어두었다.

8월 15일을 기점으로 그림처럼 날씨가 바뀌는 게 매년 신기하다. 이맘때면 조국순례대행진 4개의 팀이 전국의 네 방향에서 7월 말에 출발해서 8월 15일에 독립기념관 앞에 결집하던 때의 더운 여름이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그때에는 여름이 참 무더웠었다. 습하고 더워서 방송에서는 불쾌지수가 높다는 일기예보도 곁들여지곤 했었다. 그 여름엔 아스팔트 도로가 너무 더워서 코펠과 버너, 그리고 옷가지와 쌀, 감자 등 음식물을 나눠 배낭에 메고 하루에 28km~35km를 대전을 향해서 국토의 동서남북에서 걷는 일은 꽤 고단했다. 고마운 남학생들은 여학생보다 훨씬 무거운 베낭을 메었다. 코펠, 버너 그리고 삼각텐트까지 메고 다녔으니까. 얇은 담요도 각자 베낭 위에 얹어 묶었는데...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 한 여름에 걷고 또 걸으며 열흘이 넘게 초등학교 운동장의 텐트에서 잠을 자고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던 시절은 지금 돌아보면 젊은 시절의 용기이자 특권이었다. 경찰차가 앰블런스 대신 비상시에 대비해 함께 이동했지만 경찰차에서 휴식을 취하겠다고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발에 물집이 너무 심해서 보행이 어려운 친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발가락 연한 부위에 투명한 물집들을 몇개씩 매단채 만보기 없이도 걷고 또 걸었다. 그날의 야영지에 도착하면 조별 의료 책임자가 확인하고 물집을 바늘로 터뜨린 후 알콜 소독을 하게했다. 그렇게 선배들의 권유로 참여했던 조국순례대행진은 마음의 키를 한뼘쯤 키워주었다.

                                        *출처 : Daum

강한 햇살에 늘어져 눅진한 아스팔트 도로를 피해서 행여 논둑이나 밭둑길로 걸어가는 여정은 참으로 고맙고 행복한 날이었다. 풀이 여기저기 폭신하게 누어서 발아래에서 전하는 그 풀잎 느낌이 뒷머리까지 전달해지던, 흙이 주는 편안함, 포근함은 지금도 선명하다.

                         *출처: Daum

물이 있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방에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주는 밖을 이따끔 보며, 컴퓨터 앞에 앉아 하던 일을 마무리하는 지금의 평화가 행복하고 감사하다.

가끔 고단하노라면 꽃의 일상을 부지런히 올려주는 고마운 친구 블로그를 들러 꽃을 감상하고 야생화들의 고운 이름들을 따라 읽고 그들의 생태를 읽는다. 그리고 늦은 밤에는 하루 뉴스를 요약해서 올려주는 후배의 카톡방에 다녀오면 하루내내 꽃향기가 담긴 마음이 된다.

자료들을 분석 중이던 큰 딸이 세면대로 나가더니

"엄마, 물이 나와요~" 했다.

"어? 지금 낮 12시인데? 오후 5시까지 안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동 급수시설 점검 작업이 일찍 끝났나 보네요."

수도시설 점검이 빠르게 끝났나 보다. 간밤에 받아놓아 마음에 안심을 담아주던, 여기저기 물통의 물들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후와~

'옆 지기가 틀림없이 찰랑거리는 욕조물을 빼서 버릴 텐데... '

수돗물의 가격이야 높지 않지만, 눈가의 대책 없는 쪼글 거림에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되고 보니 사용 가능한 자원을 버리는 일이 오래전의 할머니처럼 이제는 편치 않다. 플라스틱도 될수록 덜 쓰고, 비닐봉지는 씻어서 재사용을 하고 외출 시에는 보온병과 개인컵을 가방에 담는 일이 일상적이 되었다. 한참 일하던 시절과는 삶과 생활에 대한 생각의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

국토개발의 선두주자로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누리고 살아오면서 오늘날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 나이 든 세대들만이라도 이제는 덜 쓰고 덜 버려서 환경오염을 줄여보자는 생각에 동참 중이다.

불편 감수는 꺼리는 우리들이 한 줌의 세수물을 맑게 쓴 후, 화단에 뿌려주던 부모님 세대의 절약을 어찌 흉이나 낼 수 있으랴마는 전기도 물도 퍽퍽 쓰던 젊은 시절의 무모함을 덜고 나니 맑은 물을 그냥 버리는 일은 마음이 편치 않다.

부엌 싱크대에 그릇들이 나와있는 것을 아주 불편해하는 옆 지기는 늘상 마른 행주질을 해서 각자의 자리에 잘 정돈해두니 나의 부엌은 마치 콘도의 부엌 싱크대처럼 정갈하다. 내가 설거지 당번이 되어 그릇들을 망에 엎어두면 옆 지기는 우렁각시처럼 마른 행주질을 하여 그릇들을 제자리에 넣어두곤 한다. 하물며 물을 담은 유리병들이 3개에 김치통까지 2개나 부엌에 서 있으니 그이는 여간 불편할 거다. 수돗물이 다시 나오는 즉시 말끔히 병들을 비워서 말릴 텐데...

                                      *어여쁘고 슬기로운 그녀의 새 출발을 축하하며(2014. 09. 16)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옆 지기의 협조를 받아 오늘 오후 내내 담아져 있는 물을 차례대로 사용해서 차를 끓이고 밥을 하고 음식을 만들었다. 욕조 1/4쯤 남은 물도 내일 아침 샤워 전까지 사용하면 대충 사용될듯하다나. 아마도 오늘 밤이면 다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세수도 하고 욕실 물청소도 하는 걸로...

"이왕 받아놓은 물병의 물들을 보기는 불편해도 저녁식사 준비에 사용하면 어떨까요?" 눈치를 보며 건네는 내게

"그래요, 맑은 물을 왜 버려?" 하는 답변이 왔다.

'우와, 물병을, 김치통 물을, 욕조물을 냉큼 정리하지 않고 내일까지 기다려준다고?'

'그대도 이제 보니 많이 늙었소~

물이 아까운 걸 알다니...'

그러고보니 아내는 남자호르몬이, 남편은 여자호르몬 수치가 점점 커지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