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Excuse me~

23. 서울과 시드니의 대학병원 소아병동

redlips 2021. 7. 3. 15:32

             *기침에 좋다는 도라지가 피운 꽃(출처: 꽃나무 애기 Band)

 

1980년대에 태어난 큰 아이에게는 백일해를 빼고 예방접종을 했다. 오늘날의 'Covid 19' 즉 '코로나 19' 백신 부작용처럼 당시에 영아들을 대상으로 접종했던 백일해 백신의 부작용이 영국에서부터 보고되며 전 세계적으로 영아의 'DPT(Diphtheria 디프테리아, Pertussis 백일해, Tetanus 파상풍)' 백신 접종 후 사망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유사사례가 발생하면서, 개인병원에서는 의료사고를 염려하여 'DPT ' 대신 'DT'만 접종해주었다. 보건소에서는 'DPT'를 접종했다.

자주 다니던 소아과에서는 백신 접종을 위해 예약하고 방문한 아이엄마에게 당연한듯 'DT만 주사한다'며, 백일해 예방백신까지 원하면 보건소로 가서 접종하라고 했다. 백신접종 후 영유아가 사망할 가능성이 있어서 병원에서 백일해를 빼고 주사하고 있다는데, 어떤 엄마가 아기의 생명운을 하늘에 맡기고 'DPT'를 접종시키겠다고 하겠는가?

그렇게 큰 아이는 'DT'만 접종하고, 2년 뒤에 태어난 작은 아이는 부작용 문제가 대체로 해결된 'DPT'를 접종하였다.

                     *도라지

그리고 큰 아이는 출생 후 15개월 즈음에 기침감기 증세가 심해져서 TV 출현이 잦은 소아과 의사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가 근무하는 종합 병원에 어렵게 입원했다. 그 유명한 의사는 기침이 멎지 않아 호흡이 편치않은 큰아이의 병명을 폐렴(Pneumonia)라고 알려주었다.

4주 동안 폐렴으로 치료하던 그 병원에서 퇴원상담을 신청하니 아직 완치된게 아니라며 만류했다. 아이엄마의 입덧이 심해서 괴롭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겨우 퇴원을 허락받았다. 그때에야 의사는 '폐렴과 유사한 증세였는데 치료 중에 알고 보니 백일해로 판명되었다'라고 병명을 바꾸어 설명했다. 문자 그대로 4주 입원 동안 아기의 기침이 심했다. 그리고 아기는 100일을 꼬박 앓고 회복되었다. 지금도 폐렴과 백일해 증상이 체온을 비롯해서 많이 다른데 그토

록 명의로 알려진 의사가 오진을 했던 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 같은 의료진에게 묻기도 쉽지 않았고, 아기 엄마의 나이도 20대였으니 그저 고개만 숙였다.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있던 그 종합병원에 한 달여를 입원해 있는 동안 큰아이는 막 발을 떼서 걷는 일이 즐거웠던 월령이었다. 가장 작은 유아 환자복이 길어서 다리 단을 접어 입고 아장거리면 금새 바지단이 내려오며 짝짝이 길이가 되곤 해서 같이 입원동지인 유아보호자들이 소리내어 웃으며 접어올려주곤 했다. 혹여 바지단에 걸려 병실의 가장 막내 아기의 서툰 발걸음이 넘어질까봐... 아장아장 걸으며 자신의 걷기를 자랑스러워하는 아기에게 잠깐식 걷기를 허용한 아기 엄마는 그 뒤를 따르며 다치지 않게 링거줄을 들고 조마조마했다.

식사시간에는 소아들이 스텐 밥공기 뚜껑을 바닥으로 던져서 나는 소리를 좋아해서 여기저기서 스텐 뚜껑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큰 아이는 기침이 나올 때마다 구토를 같이 하여 침대 시트를 적셔서 보호자가 요령껏 손으로 부분 세탁을 하고 마른 천 기저귀로 덮어서 다음날 시트를 갈아줄 때까지 기다렸다. 침대 시트는 하루에 한 번만 갈아준다는 간호사의 설명에 그런 수고를 했던 기억이 지금은 아련하다.

양팔, 발등, 이마까지 링거를 꽂아서 주사 멍들이 여기저기 푸릇푸릇했다. 이마에 링거를 꽂았을 때에는 여간 안쓰러웠다. 주삿바늘을 꽂는 동안 아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을 펑펑 쏟고 울었다.

어느 날은 잠들지 않고 아장거리는 아기를 발견한 소아병동 간호사가 갑자기 불을 꺼버렸다. 여대 반지를 손에 끼고 자랑스러워했던 그녀는 미혼이라서 육아 경험이 없어 소아병동 간호사 직업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이후 아이엄마는 아이의 잦은 병치례에 잘 대응하는 보다 강건한 엄마가 되기 위해 이웃의 조언대로 병원 대신 약국을 드낙거렸다가 호되게 부작용을 경험한 끝에 소아과 의사의 긴 충고를 들었다. 그 이후에는 아기 엄마의 용기가 얼마나 무모한 지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병원에서 상담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아기 보호자들과의 크고 작은 품앗이 도움은 인상적이었다. 참 따뜻한 마음을 지닌 보호자들은 옆 침상 보호자의 어려움 해결에 손을 내밀어 거들어주곤 했다. 아기들의 병증은 다양했지만 보호자들의 아기 건강을 향한 염원이 같았으므로.

 

덕분에 링거를 꽂고 잠이 든 아기를 이웃의 보호 아래 놓아둔 채 기저귀나 우유를 구입하러 30분 정도의 보호자 외출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의 두 차례에 걸친 병원생활 경험과는 비교불가이다.

아이 아빠의 발령과 함께 이주한 시드니에서 큰아이는 사소한 감기 끝에도 편도선에 염증이 생기곤 해서 여전히 고열로 인한 병원 출입이 잦았다. 그 시절에는 편도선 절제를 될수록 삼가는 분위기였지만, 정상생활이 어려울 만큼 잦은 고열을 동반한 편도선염이 잦은 큰아이의 경우에는 시력발달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아기가 열이나면 정말 온몸이 그렇게 따끈따끈한 몸이 된다는 것도, 그 열이 시력과 청력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도, 심지어 뇌 발달에도 장애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주 5일 가는 것이 아니라 내년 취학반은 주 3일 그리고 더 어린 아동들은 주 2일반을 선택할 수 있다. 워낙 대기줄이 길어서 선택이 아니라 그저 빈자리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거다. 큰 아이는  내년에 학교 유치원 입학 대상 연령인지라 의사소통의 도구인 영어학습을 위해 주 3일반에 대기를 신청했다.

 

길건너 집 앞에 있는 유아원에 두어번 더 들러서 혹여 전학간 아이자리가 있는지 묻고, 내년 학교유치원 취학을 앞둔 외국인 아동인데 내성적인데다가 언어습득이 안되어서 걱정임을 설명했다. 

 

유아원 원장이 딱했던지 해외로 출국한 일본 아동의 자리가 비었다며, '서울이'가 주 2일반에 다니면 어떨지 의사를 묻는 전화를 주었다. 아이엄마는 작은 아이는 업고 큰 아이는 유모차에 태워 당일에 가서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 제출했다. 

 

*시드니의 자카렌다(출처: Daum)

 

'주 3일 반'과 '주 2일 반' 중 이틀 출석하는 2일 반의 유아원을 다니는 큰 아이는 그마저도 자주 고열로 결석이 잦았다. 어느날은 유아원에서 전화로 '아이가 열이 난다며 데려가서 집에서 쉬게 하는게 어떤지?'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 귀한 이틀을 제대로 못 다녀서 차라리 '토.일.월.화.수' 중에 열이 나고 '목.금'은 건강하기를 빌었다.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집에서 쉬는 5일을 피하고 유아원 가기 전날인 수요일 밤에 열이 오르면 한숨부터 나왔다. 

 

낯선 곳에서의 요긴한 교육정보를 미리미리 전달하여 늘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는, 아이엄마의 선배언니는 

 

"그 집은 아빠가 월급타서 병원에 다 갖다주네, 아이고~" 했다. 

 

아동발달과정이 이루어지는 성장기이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5학년이 되면 수술하자던 전문의사의 소견이 잦은 고열로 인한 부작용을 걱정하여 조기 절제 수술로 바뀌었다. 그렇게 외국어 습득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영어 의사소통이 힘든 5살 아이가 편도선 절제를 위해 외국의 소아병동에 입원을 했다.

*미국의 자카렌다(출처: Daum)

 

한국에서 편도선과 잦은 호흡기 질환으로 인한 고열로 입원을 했을 때는 늘 보호자가 곁을 지켜야 했는데, 그곳에서는 면회시간에만 환자가족의 방문이 허용되었다. 면회시간에 만난 큰 아이는 'Yes, No, Thank you, Toilet, Excuse me" 정도가 가능하고, 상대의 긴 표현은 알아듣지 못하여 나머지는 주로 고개를 젓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등으로 소통하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의사소통이 아직 편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병원에 가족없이 남겨진 큰 아이는 즐거워 보였다. 

편도선 절제 수술을 한 경험이 있는 아기 엄마의 눈엔 낯설은 장면 하나... 수술 다음날 아직은 상처로 인한 통증이 있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이 제공되었다. 지혈에 도움을 준다며 간식으로 아이에게 제공된 '아이스 바' 먹기를 지켜보다가 부모와의 면회시간도 끝났다. 그리고 아이는 간호사와 보조 도우미의 손을 잡으며 다른 손을 올려 웃는 얼굴로 "Bye Bye'를 했다.

편도선을 절제하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아빠는 출장 중이고, 영어가 편치않은 엄마는 영한.한영 사전을 들고 혼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불안과 염려가 가득한 동양인 보호자의 눈높이에 맞게 간호사가 자주 와서 직접 상황설명을 영어로 말해주었다. 다행히 일상적인 영어는 어렵지 않게 들렸다. 질문을 하면 아이엄마의 발음이 불편한지 "Parden?",  "Excuse Me?"가 이어져서 아이엄마는 듣고 "Thank you."만 반복했다. 

지금은 'Korea'하면 대체로 통하지만, 그때에는 일본이 아시아 대표주자이고, 한국인은 그냥 'Asian'이었다. '88 올림픽 직후'였으니 'Seoul'의 사마란치 위원장 식 발음 '쎄울'정도는 개막식 행사를 통해 널리 퍼졌겠지만 그때뿐이고, 호주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은 1도 없던 시절이었다. 삼성과 금성(LG)은 모르고, 일본의 산요와 소니만 그들이 기억하던 시절... 

"지금 마취 준비 중/ 수술 중/ 수술이 끝났고, 출혈은 잘 지혈되어서 어려움이 없음/ 현재 회복실로 옮기는 중임" 

 

"아직 아이가 안 깨어났으니 보호자는 편안하게 병원 뜰을 산책하고 돌아오면, 아마도 아이를 병실에서 면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시간별 설명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수술 후 전반적인 설명을 의사가 보호자에게 못했으니, 보호자가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면, 수술을 집도한 대학병원에서 환자 보호자에게 수술 집도의가 직접 설명을 해주기 위해 병원에 들르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수술 집도의는 가정의(Family doctor)가 초진 후 소개해서 만난 전문의(Special doctor)였다. 사실 그곳에서 미국과 영국의 유명 대학을 나온 그 의사는 이미 너무 유명해서 예약 일정이 보통 6개월 후... 큰 아이의 경우에는 GP가 병증이 너무 자주 반복되어 전문의 진찰소견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설명한 끝에 빠르게 진료예약이 성사되었다.

* 책보물 1호

 

편도선의 기능을 설명하며, 당시의 트렌드는 편도선 절제보다는 편도선을 살린 채로 유지하며 치료한다고 했다. 그러나 큰아이는 편도선이 비대해서 감기만 걸려도 금세 편도선에 염증이 생기고 폐로 문제가 이어지니, 절제에 대한 의견은 조금 더 관찰 후 나누자고 했다. 사실 유아라서 너무 어리니, 조금 더 성장 후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절제 수술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도 했다. 그때 영어 사용자와 한글 사용자 간의 소통에 YBM의 포켓용 영한. 한영사전이 여간 유용했다. 지금도 보관할 만큼 고마움이 높이 쌓였던 사전이다.

큰아이는 겨우 '주 2일'반을 다니는 유아원도 결석이 잦을 만큼 염증과 지나친 고열이 반복되었다. 담당 전문의는 결국 수술 결정을 했다. 이곳에선 개업한 전문의가 대학병원의 시설과 스텝들의 도움을 받아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한다. 우린 5년 거주 비자로 임시거주 중인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메디케어 덕분에 무료로 수술해주었다. 병원비가 전액 무료였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산타클로스 선물 배낭 같은 의료혜택이었다.

 

수술 다음날 밤에 출장에서 돌아온, 영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아이 아빠를 대동하고, 밤 7시가 넘어 수술집도의와 대학병원에서 만났다. 순전히 아이 아빠가 가능한 시간에 맞춰서 미팅 시간을 잡아주었던 그 배려에 가슴이 뛰었다. 키가 크고 핸섬한 40대 의사는 키가 작은 동양인인 아이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이의 수술 경과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제 7 안식일 교회'에서 운영하는 SDA 생활영어를 3년이나 공부했던 아이 엄마는 결혼 후 영어책을 덮고 청소와 빨래, 그리고 음식 만드느라 체력을 쏟으면서 짬짬이 에세이 정도만 펴들었던 터라, 정작 영어나라에서 의사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리 쉬운 표현이라 해도 살아있는 의학용어 더하기 설명은 아기 엄마에게 생생한 문맹 경험을 더해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 엄마는 병원이 긴장되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30여 년 전의 시드니 병원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덮어두었던 영어를 다시 배우기로 했다. 필요할 때 아이 아빠는 늘 '근무중'으로 출장이 잦아 통역도움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서 자주 아이엄마의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곤 했다.  몇 개월 전부터 예정된 입원당일에도 아이아빠는 출장 중... 다음날 저녁 비행기로 돌아왔다. 예측이 쉽지 않은 일상을 지닌 아이아빠에게 행여 도움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